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 - 리 - 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사 피트 십 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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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LOLITA.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 - 리 - 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사 피트 십 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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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LOLITA.
류시화 시인의 책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나 <지구별 여행자>를 읽어본 이들은 인도에 대해서 환상을 품곤 한다. 언제나 ‘노 프라블럼!’을 외치는 인도인들이 다 쿨해 보이고, 거지들마저도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명언을 줄줄 외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다녀와 보니 ‘별거 없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류시화 시인이 책을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썼다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아직 그 나라에 가보지 못한 내게 인도는 여전히 아름답고 신기한 나라다.
책을 읽다 보면 인도의 옛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는 그 단어의 어원과 뜻을 알게 되는데 그때 나는 ‘세상엔 이런 언어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도의 전통 인사말인 나마스떼(Namaste) 역시 산스크리트어다. 이는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하다(존경을 표하다, 경배하다)", "나는 이 우주를 모두 담고 있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마음과 사랑을 다해 예배드립니다", "나는 빛의 존재인 당신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 인도의 뭄바이 지역에서 인기 있는 영화산업을 일컫는 말이 바로 발리우드다. 발리우드(Bollywood)는 뭄바이(Mumbai)의 미국식 옛 지명인 '봄베이(Bombay)'와 '헐리우드(Hollywood)'의 합성어다. 인도는 1년에 영화를 가장 많이 찍는 나라로 영화에 대한 인도인의 사랑도 그만큼 대단하다. 헐리우드 영화 ‘아바타’가 역대 세계 흥행 1위를 기록하며 세상을 누빌 때에도 인도에서 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바타의 매력에 심취해 있을 때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은 영화는 ‘3 idiots’다.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사회 현실에 도전하는 내용의 영화가 인도 영화사상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을 동원한 헐리우드 영화가 인도의 발리우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영화를 모두 본 나 역시도 인도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인도 영화의 매력은 바로 '공감력'에 있다고 본다. 인도인들이 영화를 보며 떠들어대고, 뭘 집어 던지고, 같이 춤까지 추는 것은 인도만의 특성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영화가 그만큼 흡입력이 있고 공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사랑과 춤, 웃음으로 풀어낸다.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이야기에 쉽게 동참할 수 있게 한다. 진실성이 담긴 메시지가 관객의 마음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것이다.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선입견을 영화를 통해 녹여내고, 뼈아픈 사회 현실 또한 영화를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세계문화는 어딜 가나 통하는 것이고, 지역문화는 그 지역에서만 유일하게 통하는 것이라면 그 둘의 관계는 대등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지역문화가 좀 더 우위에 있었으면 한다. 인도의 발리우드처럼 말이다. 세계가 한 체제의 영향력 아래 통일되는 것 보다는, 각자가 영역을 만들어 서로 교류할 때에 더욱 건강하고 풍요로운 문화가 탄생한다. 그러면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각자의 영역들도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3 idiots’의 주인공 란초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꿈을 따라가라고 말한다. 문화도 가장 그 나라다울 때 국경을 넘어 세상을 녹인다.
“3 × 9 = 3”
아미르 칸 감독의 영화 <모든 아이들은 특별한 존재이다>의 주인공인 '이샨'이 풀어낸 수학문제다. 이샨은 '×'를 통해 우주의 문어 외계인을 연상하고는, 태양을 공전하는 3번째 행성인 지구를 9번째 행성인 명왕성 자리에 옮겨 넣는다는 상상을 한다. 자신이 직접 우주선을 운전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이의 상상력에 감탄 또 감탄을 했다. ‘어떻게 저런 상상을 하는 거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난독증에 걸린 아이였고, 같은 증상을 앓았던 미술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저 ‘멍청하고 못된 아이’에 불과했다.
3 × 9 는 당연히 27이 되어야만 하는 세상에서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학교는 이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부모 또한 다르지 않다. 정해진 답을 알지 못한 그의 시험지에는 빨간 사선(/)이 그어질 뿐이다. 그리고 마치 칼(/)에 베기라도 하듯, 아이의 마음에도 마이너스(-)가 새겨진다.
창의력이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상상해내는 힘이다. 그러한 사고는 기존의 것을 답습하지 않는 능동적 행위다. 따라서 수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창의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 이는 머리로 외운 것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모르는 배움에서는 창의성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행할 수 없는 이유는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물이나 문제를 개인의 선입견으로 바라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대상에 생각을 반영해 버린다면, 그는 색안경이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틀을 어떻게 깨야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맴도는 격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허공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본인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거다. 머리와 몸 사이에 연결고리가 부재한다.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본성을 거스르며 살아간다.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끌려 다닌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마치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자세는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발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독립과는 멀어지게 되어 자유를 잃게 된다. 내가 나와 다른 타인의 견해를 바탕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다.
창의적인 사고는 어떤 체제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더 이상 다른 힘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 비(非)창의적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 이것이 바로 창의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창의력이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들이 모여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것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윤성호 감독의 ‘인디 +시트콤’처럼. 독립과 시트콤을 잇는 연결고리로 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줄(-)을 뛰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