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스트로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1.23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6)
  2. 2011.01.19 화가의 역할 (6)




Claude Monet : Branch of the Seine near Giverny, 1897



  

 에리봉  당신은 많은 책을 집필했고, 그 책들은 논평과 토론과 비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볼 때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레비스트로스  이 모든 게 내게는 낯설구나 하는 느낌을 받지요. 어제 어떤 사람이 내게 남아메리카 어딘가의 신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걸어왔어요. 난 내가 동일한 주제를 다루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어디서 다루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중략)...

  레비스트로스 나는 망상을 지니고 있진 않아요. 논증으론 결코 모든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설득력을 지니질 못해요. 뒤메질이 자주 사용했던 방식으로 대답해보죠. 이십 년 후, 삼십 년 후 그건 완전히 시대에서 뒤진 것이 되어버립니다.

 ...(중략)...

  레비스트로스 내가 왜 그렇게 많은 작업을 했겠어요? 작업을 할 때면 난 불안한 순간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작업하지 않을 때면 우울한 권태에 휩싸이고, 내 의식은 나를 괴롭힙니다. 작업하는 삶이 다른 것들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는 해줍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대담 디디에 에리봉,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송태현 옮김, 강, 2003, pp.151~153.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집필한 작업들을 되돌아 보면 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언급한다. 또한 논증이 모든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작업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관심사였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라는 말로 비유하여 표현한다. 흐르는 강물은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 앞의 강물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계속 지나가고 있고, 다른 물이 그 자리를 다시 채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도 그와 같다고 말한다. 상황이 바뀌면 이전에 배운 지식은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지나간 상황들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강에 발을 담그면 강물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면 우리도 변하고 상황도 변한다. 우리는 변화하는 우주의 일부분이고 우리가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관련된 것들이 변한다. 이는 구조주의와 빗대어 보아도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논증이 그가 살았던 현실에는 유효할지도 모르나 시대의 흐름과 변화 앞에서는 무효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그것이 무의식 상태에서 이루어 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e)는 중심과 주체,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며 인간정신의 구조가 무의식적이며 보편적이라고 보는 사상이다. 구조는 개개의 요소가 상호의존하는 것으로써 서로 의존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전체적인 틀을 의미한다. 요소들은 서로 결합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나의 요소가 변하면 전체가 변화하게 된다. 각 요소들은 고유한 역할이 있으며 위치로써 기능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를 미개와 문명의 구분 없이 하나의 구조로 판단했으며, 모든 사회가 구조적인 전체성을 가지고 있고, 독립된 사회는 그 자체로 유기적인 전체라고 규정지었다. 또한 신화, 친족관계, 사유하는 것도 구조로써 파악하였다. 



Posted by 정아(正阿)



 Vincent van Gogh: "Child with Orange", 1890


 

  에리봉  화가의 일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색채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당신에게 반박을 가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  내가 보기에, 화가의 일은 현실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6세기와 17세기의 네덜란드 정물화가들이 치즈 조각의 구조, 투명한 유리잔, 솜털로 뒤덮인 과일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노력한 것은, 물리적인 인상과 화가의 작업이 내포하는 지적인 작용 사이에 상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화가의 작업은 감각 세계에 대한 지적인 반영이 됩니다. 화가는 우리가 내부로부터 감각 세계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에리봉  술라주는 당신이 19세기의 군소 화가들만 찬양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  그건 부정확한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야생의 사고』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문자 P를 사용할 수 있는 화가peintre가 모든 것을 발견했으며, 그 이후의 회화는 그가 이룩해놓은 것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빚지고 있는 화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반 데르 바이던Van der Weyden이라고 밝혔기 때문이지요. 다른 화가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에게 내 자신이 보는 것보다 실재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세상사 속에서 나를 감동시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의 지각과 인식 능력을 보조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혹은 한때는 실재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 세계로 접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지요. 나는 막스 에른스트에 감탄하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이런 사실은 내가 현대화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대담 디디에 에리봉,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송태현 옮김, 강, 2003, pp.265~266.




  

 나는 화가를 바라보는 레비스트로스의 시각에 동의한다. 언젠가 나는 화가의 역할이란 '사람들이 세상을 더욱 사랑하도록 돕는 것'이라 여겼던 적이 있다. 화가의 역할이 그림에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진기로 대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일반 사람들은 인식하기 어려운 실존하는 것들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평가하는 대표적인 화가로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를 들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는 색채를 통해서 연인의 사랑, 마음의 떨림, 사상, 희망, 열정등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를 눈속임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밖에 인식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초현실의 세계로 초대하는 화가들로는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세라핀 루이(Séraphine Louis, 1864~1942), 파블로 아마링고(Pablo Amaringo, 1943~2009) 등을 들 수 있다.




Posted by 정아(正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