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책을 읽으며 겹겹이 쌓여 있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생각하고 감정을 느낀다.
그러는 중에 그토록 심각해져서는 단지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이름 하나 입에 올리는 것 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날 만큼 진지해진다.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내 이야길 농담처럼 웃으며 꺼내놓았더니 하나도 심각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기까지 했다.
(물론 구체적인 실제 상황과 비교를 하자면 큰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간의 내 오해가 깊었던 만큼 감정 또한 깊어진 것 뿐이어서
하나의 습관처럼 튀어 나오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실제라거나 사실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전혀 없는.
고통이 찾아 올때마다 '뭐가 문제지?' 할게 아니라
'더 나아질 게 남은거구나'하고 피하지 않으며 그대로 직면해서 수용할 것.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근육을 키워둘 것.
얼음장 같던 내게도 그리운 얼굴들이 생기는 걸 보면 이만큼 살아온 것도 대단한 일이다 싶어진다.
참 행복한 일이고.
그토록 차갑던 와중에도 수십 권의 소설들을 읽어댔던 건, 그 속에서라도 사람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온기를, 진실한 사랑의 증거 같은 걸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때때로 같은 이유로 그런 이야기들에 빠져들게 된다.
감정을 솔직하게 털털 털어버리기.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기.
좋다. 편안하고.
아이들과 개미를 잡아다가 넣어둔 유리병에서 드디어 개미집이 발견되었다.
순전히 어릴 적 기억에 의지해서 해본 작업이었는데, 어찌나 신기하던지.
개미들은 서로 가족도 아닐텐데 어떻게 다같이 힘을 합해서 한 공간에 집을 짓는걸까.
처음 보는 낯선 개미들끼리.
손톱 보다 작은 새끼 개미들이 눈꼽보다 작은 흙을 하나하나 나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숨을 죽이고 작고 느린 존재의 움직임을 지켜본다는 건 이런 느낌을 주는구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개미를 채집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다치거나 죽게 되는 개미가 있게 마련이고,
그걸 알면서도 이런 일을 벌였으며,
아무리 안락한 조건에 개미들을 넣어두었다고 해도 그건 개미의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일을 벌려놓은 것은,
아이들이 그런 개미들을 지켜보면서 생명에 대한 호감과 신비함을 느끼며,
앞으로도 계속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만약에 만약에 그것에 성공하게 된다면, 죄값은 어떻게 계산 될까?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만신창이 같이 세상 모든 시름을 다 끌어 안은 듯한 기분이었는데
일주일 사이에 이토록 삶이 희극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좀 더 버티고 지켜보는게 남는거다 싶어진다.
무지무명으로 지었던 지난 과거의 모든 잘못들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_()_
지금 여기의 삶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_()_
행복과 고통을 구분하지 않고 수용하며 당당한 삶을 살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_()_
모든 선근공덕을 일체 중생께, 일체 부처님께 회향합니다.
옴아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