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올 것인가?
고도는 고고와 디디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를 통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시간이 빨리 갈수록 고도는 빨리온다. 그러므로 가능한한 시간을 빨리 죽여야한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도는 무엇인가? 이에 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없다. 단지 그들의 대화와 무대, 묘사등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 단순한 기다림. 기다림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인지도 없다. 약속을 받았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이유가 없다.
고고와 디디는 포조와 럭키를 만난다. 포조는 럭키를 이리저리 끌고 학대한다. 포조는 럭키를 소유한 것으로 보이지만 반대로 럭키에게 구속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럭키는 포조에게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고고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포조는 기억과 시각을 상실한다. 시간이 무의미해진다. 과거를 상기시켜줄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럭키는 무기력 하다. 그러나 생각한다. 딱 한번, 난해한 '말'들을 미친듯이 토해낸다. 당나귀 같은 럭키는 말을 통해 존재하고 표현하고 의미를 대변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인간성 상실의 상태로 돌아간다.
고도는 내일 온다. 기다림의 이유는 없다. 고도는 고도이다. 기다림은 끝 없이 반복된다. 기다림의 끝은 죽음이고, 고도는 오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의 존재에 관하여 끊임 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철학과 종교, 그 이외의 모든 학문과 문학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어떤 종교나 학문도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이 기다리는, 어쩌면 '기다림'자체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그 기다림은, 고고와 디디의 '고도'와 다를 바 없다.
고도는 올 것인가? 내일은 오는가? 시간을 애써 죽여가며 지루함을 견뎌내는 기다림은 모두 고도를 위함이다. 오로지 고도를 위하여,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죽음' 마저 포기한다. 그렇다면 고도는 반드시 그를 위한 모든 행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가치가 있어야 하는 대상이고 기다림에 따른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이유 없는 기다림이어야 한다면, 이는 무의미를 더 크게 확장시켜줄 뿐이다. 무의미한 기다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도는 반드시 와야만 한다. 그래야 끝없는 기다림에 이유가 있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고고와 디디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기다림이다.
어쩌면 작가는 내일의 기다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이는 나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