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7.09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 곽철환
  2. 2016.06.12 불교의 무아론 - 한자경
책 읽기2016. 7. 9. 21:24

 

 

 

 

홍서원에서 법공양을 받아 읽게 된 책 :)

감사합니다. 이 책을 읽게 된 공덕을 일체 중생과 부처님께 회향합니다... _()_

 

 

 

 

p. 36-37

 에고는 '자신만 소중히 여기고, 자신은 남보다 나은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자아에 대한 집착'과 '저항'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 남이 자신을 주목해 주고 알아주길 갈구하고, 남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대접해 주길 바라고, 자기주장을 끈질기게 내세워 자기를 선전하기에 바쁘고,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대로 남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허나 이러한 생각이나 바람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왜냐하면 남들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는 착각과 환상의 덩어리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의 존재나 가치를 알아주지 않을 때 갈등을 일으키고 분노한다. 이 분노가 곧 저항이다.

 이 저항은 생각의 차원에서는 불필요한 판단이고, 감정의 차원에서는 부정적이다. 분노하는 것은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이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일으키는 저항이다. 뭔가에 저항하면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거기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p. 84

 먼저 여래의 사마타(奢摩他) 수행에 의지하고, 계율을 굳게 지니고, 대중과 함께 편안히 거처하고,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서 항상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나의 이 몸은 4대(大)가 화합한 것이니, 머리카락 · 털 · 손발톱 · 이빨 · 살갗 · 살 · 힘줄 · 뼈 · 골수 · 뇌 · 더러운 형상은 다 땅[地]으로 돌아가고, 침 · 콧물 · 고름 · 피 · 진액 · 가래 · 땀 · 눈물 · 정기 · 대소변은 다 물[水]로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은 불[火]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기운은 바람[風]으로 돌아간다. 4대가 제각기 흩어지면 지금의 허망한 몸은 어디에 있겠는가.'

 

 

p. 86

 무아(無我)의 상태에서는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다. 자아가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걸어가지만 걸어가는 자는 없고 걸어가는 행위만 있고, 밥을 먹지만 밥을 먹는 자는 없고 밥을 먹는 행위만 있고, 살아가지만 살아가는 자는 없고 살아가는 행위만 있다. 비유하면, 아이가 놀이에 빠져 있는 동안 놀이하는 자는 없고 놀이만 있고, 영화 관람에 몰입해 있는 동안 관람자는 없고 관람만 있고, 독서삼매에 빠져 있는 동안 독서하는 자는 없고 독서만 있는 것과 같다.

 개체적 자아라는 생각을 안고 있는 한 결코 안정에 이를 수 없다. 어디에 집착한다는 건 거기에 속박되었다는 뜻이니, 개체적 자아라는 생각의 소멸로 집착이 떨어져 나가버린 게 해탈이다.

 무아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자아'를 없애라는 게 아니라 애당초 '자아'는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p. 131

 밥 먹을 때 밥만 먹는 게 평상심이다. 허나 범부들은 밥 먹을 때 밥만 먹는 게 아니라 천만 가지 생각을 하고, 걸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온갖 생각이 허공을 떠돈다. 몸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여기'를 떠나 안 가는 데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이것', 이게 전부다. 그 외는 모두 망상이고 허구다.

 

 

p. 146-147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慈),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비(悲), 남이 즐거우면 함께 기뻐하려는 희(喜),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사(捨)가 '자기를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는 것[自護護他]'이고, '남을 보호하고 자기를 보호하는 것[護他自護]'이다.

 왜 자비희사(慈悲喜捨) 를 닦는가?

 그것으로 탐욕과 분노와 남을 해치려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집착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아, 마음을 평온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량없는 중생에게 일으키는 자비희사, 즉 4무량심(無量心)은 자신을 돌보고 남을 돌보는 일이다.

 

 

p. 147-148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자신을 가장 염려해주는 사람'이고,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은 '자신을 가장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고, 가장 소중한 일은 '자신이 좋아해서 몰두하는 일'이고,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p. 148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게 남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고, 남을 소중히 여기는 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자신을 책망하지 않고 너그럽게 감싸주고 정답고 따뜻하게 보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저항이며 학대이다. 누구나 결함이나 허물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껴안아 용서하지 않고 싸우기를 계속하면, 자신은 긴장 속에서 분열되고 자책의 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결함이나 허물에 더욱 더 민감해져 결국 자학에 이르게 된다.

 

 

 

Posted by 정아(正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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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2016. 6. 12. 13:26

 

 

 

 

 

밤하늘 소녀 #19
2015_ pencil on paper & digital

아주 오랜만에 마니(☜ 링크)님 그림. 싸이월드 시절 알게 되었던 그림작가님. :)

정적이면서 식물스런 감수성이 참 좋았던 그림들 -

 

 

 

 

 

 

읽어보라고 주신 책 :)

아함경을 먼저 읽기 시작했었는데 아직도 덜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서 아함경도 읽어야지 싶다.

큰스님 말씀으론 부처님 가르침은 참 쉽다고 하셨는데, 불교 관련 서적들을 읽다보면

학창시절 이해할수 없었던 지적 정보에 대한 그 어려운 느낌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이게 싫다는 건 아니고... 공부에 대한 갈망 같은게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여서 오히려 잘됐다 싶다.

열공해야지. ㅋㅋㅋㅋ

 

 

 

 

p. 9

 왜 우리는 상대와 차이에 머무르지 못하고 절대에로 나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운명적으로 형이상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형이하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죽음을 의식하고 공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보여진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보여진 세계의 상대성을 말하지만, 그 말이 참이 될 수 있는 것은 말하는 자가 그 말 밖에 있기 때문이다.

 

 

p. 35

 관념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관념이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지 그런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과 관념이 그에 상응하는 실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통찰이다.

 

 

p. 53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p. 115

 이런 관점 하에서만 우리는 인과 과, 업과 보의 각 순간을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찰나 생멸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이 멸하고 과가 생하는 순간, 그 찰나 자체는 이전 찰나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찰나 이므로 새로운 힘의 작용, 새로운 업의 시작이 또한 가능한 것이다. 한 순간은 그 이전 순간의 업의 결과이지만, 바로 그 순간이 그 다음 순간을 결정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순간의 현재적 작용력은 단지 과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새롭게 발휘되는 힘이다. 따라서 매순간은 이전 순간에 의해 규정받는 수동성과 더불어 바로 그 순간에 새롭게 작용하는 능동성이 함께 한다. 바로 그 능동적 작용이 있기에 새로운 조업 작용이 가능하며, 그 새로운 업에 의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업의 흐름이 새로운 지향점을 향해 방향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이다.

 

 

p. 124

 이렇게 보면 불교는 선악의 근본, 업의 근본을 행위 자체에 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의도가 없어도 신업이 성립하게 되는 것은 그 행위가 주변을 돌아보는 주의나 배려의 마음 또는 상황에 대한 앎이 없는 부주의 또는 무지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p. 155

 존재하면서 업과 보의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단지 오온일 뿐이며, 그 오온에 대해서는 같다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전생의 오온과 후생의 오온은 전자가 지은 업력에 의해 후자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채, 인과 과, 업과 보로서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설한다. 자아란 오온 자체도 아니고 오온 너머에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 188-189

 즉 삼매를 수행하지 않는 일반 범부에 있어 색 등으로 나타나는 영상도 삼매에서의 영상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다르지 않은 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들에게 삼매 중에 떠오른 영상뿐 아니라 우리 일반 범부들의 일상적인 지각 의식에 떠오르는 현상 세계의 영상까지도 모두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일체가 식일 뿐이라는 '유식(唯識)'이 성립한다. 결국 범부들이 지각하는 대상 세계의 영상도 요가 수행자들이 수행을 통해 보게 된 영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p. 215

 다시 말해 현상 세계는 식에 의거하여 발생한 것이며,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상 세계는 식을 떠난 객관 실유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실유(非實有)의 가(假)이다. 유식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면서, 현상 세계를 성립시키는 연기를 의타기성으로 해석하고 의타기성을 다시 유식성으로 해명한다. 식의 삼성에서 의타기성은 바로 유식성이다. 유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아와 세계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는 것, 마음을 떠난 객관 실재가 아니라는 것, 자아와 세계는 실아와 실법이 아니고 마음이 그린 영상이며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라는 것,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Posted by 정아(正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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