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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27 계초심학인문을 아십니까? - 보조지눌, 김호성
책 읽기2015. 6. 27. 18:10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계초심학인문'. 간단히 말하자면 스님들이 맨 처음에 배우는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품행이나 행실을 단정히 하는 측면에서 볼때 그 누가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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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03 - 104 (공양하는 법 中)

 우선 종래 우리가 가졌던 무주상보시바라밀에 대한 하나의 오해를 지적해야겠다. 우리는 "남모르게 하는 보시를 무주상보시바라밀이라" 배웠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없지는 않으리라.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자랑하는 일이 곧 상(相, 想의 의미이다)을 내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을 내기 위해서, 상이 있어서 자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랑을 하는 것이 반드시 상을 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경우, 어떤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그 사실을 자랑한다. 상이 있어서일까? 아닐 수 있다. 기뻐서일 수 있다. 기쁨으로 넘쳐보라. 저절로 자랑하게 되지 않는가. 보시바라밀 역시 기쁨의 사건이다. 세상에 보시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기쁨으로 가득 차서 기쁨이 넘치는데 어찌 억압하며,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기쁨은 물결처펌 파문(波紋)져 갈 것이다. 보시가 보시를 낳고, 기쁨이 기쁨을 부르게 된다.

 

 

p. 112 - 113

 보시하는 자는 보시를 함으로써 기쁨을 받는 '주고-받는 자'일 수밖에 없고, 보시를 받는 자는 보시를 받음으로써 기쁨을 주는 '받아-주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자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이것이 연기(緣起)의 이치이다.

 

 

p.135

 참회를 할 때는 "나는 죄업이 무거운 중생이야"라고 스스로를 낮추지 않았던가. 그래야만 참회가 성립된다. 그러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비하하기만 해서는 아니 된다. 중생으로 비하하여 스스로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발심(發心)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말씀이 "예배하는 자와 예배 받는 자가 모두 진성(眞性, 여래장)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는 선언이다. 업을 지어서 참회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부터 그렇게 업만 지으면서 살아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여기서 제시된다. 앞부분에서 제시된 참회는 과거를 향해서 과거를 청산하라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 제시되는 "부처와 중생이 모두 한가지로 참된 성품으로부터 생긴 존재"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미래를 향해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라는 메시지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당당하게 정진을 해야 한다. 그와 같은 우리의 정진이 "헛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게 "깊이 믿어야 한다. 마치 형체에는 그림자가 따르고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Posted by 보리바라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