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긍정일기2016. 5. 23. 21:27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행복이야기>

 

2010년부터 시작해 일곱번째 읽은 책.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색색이 곱게도 칠해놨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이제야 좀 알아 듣는 귀가 생긴 것 같다. 보는 눈이 생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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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 중에 아이 하나가 빨간 용액이 든 병을 엎지르는 바람에 실험이 멈춰졌다. 실험 전 내가 주의를 주었던 부분은 오차가 있게 되면 실험을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아이들은 아이가 실수하기가 무섭게 '실패다' '실패야'하고 이야기 했다. 실수를 저지른 아이는 평소의 성향과는 다르게 스스로 잘못했다 여겼는지 잔뜩 긴장한듯 보였고, 나는 아이에게 손에 묻은 용액을 씻고 오라 일렀다.

 

 쏟아진 액체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조심성 없이!', '걸레 가져와서 닦기 귀찮다' 였는데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어도 '불쾌함'의 감정이 들었던 것은 분명했다. 예전 같았으면 "조심해야지요"하면서 다그쳤을 것도 같은데 이번에는 그러지는 않았다.

 

 손을 씻고 온 아이는 그제서야 조금 마음이 괜찮아 졌는지 "친구들아 미안해", "선생님 죄송합니다."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사과를 했다. 그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것이, 아이 스스로도 충분히 그런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데 그간 내가 먼저 말을 내뱉음으로 하여 아이들의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더 키워온건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다. 오늘도 내 생각을 먼저 뱉어버렸다면 분명히 아이의 태도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곧바로 '조심성 없는 아이'로 낙인을 찍어버렸을 텐데 차분히 걸레질을 하고 보니 아이는 너무도 미안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괜찮아"하고 말은 해주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실패야"라고 했을 때 '그럴 수도 있다, 다시 하면 된다'는 말을 진심으로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리고 실험을 실패한다는 표현을 써서 미리 겁을 준것 자체가 어리석었음을, 저 한마디 말로 인해 아이들에게 부정의 마음을 심어준 것에 죄책감이 든다. 틀리면 다시 하면 되는 건데. 심혈을 기울이는게 중요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쓴 표현이 이토록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말았다.

 

 물론 실험은 계속 진행되었고 몇번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했지만 성공적으로 맺을 수가 있었다. 아이는 조금 후에 배가 아프다는 얘기를 했는데 아마도 긴장한 마음에서 비롯된 신경통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이 끝나기가 무색하게 점심 밥도 맛있게 잘 먹고 큰 탈은 없었기에 다행이었만, 후에라도 좀 더 따뜻하게 위로해주지 못한 내 좁은 마음 때문에 참 미안해진다.  

 

 앞으로는 나 자신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경솔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순간을 깨우쳤으니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간 깊게 길들여 놓은 부정적인 습관으로부터 멀어지고 새롭운 긍정의 길을 닦아 나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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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루중에 가장 기뻤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떠올려 보니, 깔깔 웃는 아이를 바라보면 나도 깔깔 거리며 따라서 웃던 순간이었다. 가장 기쁜 순간은 이런 것이구나. 이토록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데. 이런게 비어있으면서도 그대로 원만한 마음인걸까. 이런 순간을 선물해준 오늘에게 감사하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이치를 받아들여, 나의 상을 내려놓으니 수용하는 폭이 좀 더 커졌다. 그로 인해 한뼘 쯤은 더 행복해진 마음에 감사하다. 기쁨도 괴로움도 수용하는 대긍정의 마음이 나를 항상 기쁜 존재로, 문제 없이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놓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이런 큰 믿음으로 조바심을 내지 않으며 차분히 나 자신만을 바꿔 나가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이루어진다. 바른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과 지금의 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애를 써준 온 우주에 머리 숙여 감사하는 마음... 옴아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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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깨우침을 주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귀한 존재로 알고 함부로 얕보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가식적인 정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자비심으로 대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떳떳한 삶이기를 바래본다.

또한

 일할 땐 일,  공부할 땐 공부. 꾸준히 게으름 피우지 않으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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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품은 긍정의 마음이 온 존재계에 영향을 미쳐 다함께 행복해지기를.

 

 

 

  

Posted by 보리바라봄
느낌과 기억의 기록2016. 5. 21. 20:52

 

 

 

 

혼자 다녀온 지리산 홍서원에서의 점심공양. 세계 최고의 밥상 ♡

엄청난 낯가림(?) 덕에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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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화를 내고, 질투를 하고, 욕심을 낸다.

이 모든 것이 무지무명에서 비롯된 일.

겹겹이 쌓인 두터운 업을 관조함으로 하여 서서히 녹여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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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엔 몇가지 옷들을 내다 버리고, 쌓여있던 짐들도 살짝 정리를 해봤고,

화장실 청소에 신지 않던 긴 장화를 잘라 장마철에 신고 다닐 수 있도록 바꾸어 놓았다.

야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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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의지해야지 만이 형상이 보이는 것들은 그림자가 있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밝음 그 자체는 그림자가 없다.

형상의 실체는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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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소리에 불과한 것인데 그를 통해 온갖 상을 지어내고 한치의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버리고는

불안과 실망, 분노와 같은 고통 속에서 허덕이며 산다.

아이고 아무리 머리로 안다 한들, 실생활에서 마주쳤을때 얼마나 빨리 알아채느냐 이게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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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맨날 예쁘다고 해주고. 오징어 춤을 춰도 천사라고 해주고.

우리 꼬꼬마들은 내 어디를 보는 걸까.

마음이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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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등바등 모으는 것들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부질 없고 쓸모 없는가 하는 생각이

찰나에 들면서 갑자기 마음이 풍요로워졌으나, 그럼에도 실생활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부자 마음이 됐다고 기뻐하기도 잠시 쉴새 없이 집착하며 끄달리는 마음과 

이래 저래 핑계대며 가난한 마음을 내는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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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서 이따금씩 점심 메뉴로 '하이라이스'가 나오곤 했는데, 어영부영 먹다가 요번에

무엇이 들었나 확인을 한번 해봤다. 그 동안은 한번 보겠다는 말 한마디가 어려워 못하다가 용기를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 분말 안엔 '우유, 소고기분말, 양파 …' 등등이 들어 있었다. 채식을 한다더니 눈가리고 아웅이었구나.

 

우유는 비좁은 공간에서 강제로 임신을 당하며 새끼를 낳자마자 떠나보내야 하는 어미소의 눈물이요,

소고기분말은 말 그대로 살아있었던 소를 (한번도 생명답게 살지 못했던) 갈아 가루를 만들어 버린 것이며,

양파는 마음을 들뜨고 산란하게 하여 마음 지키기를 방해한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키고 싶다면, 동시에 다른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착한 마음을 내고 싶다면

먹지 않는게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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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샵에서 판매되는 강아지들의 처참한 실상을 알고서는 그토록 마음아파 하면서 그런 일들이 채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니 어떤 공감이나 들어주고 싶은 마음보다는, 답답함과 싫어하는 마음이 더 크게 일어났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생명들의 목숨을 구해낸 일은 틀림없이 가치 있는 행동이지만 본질적인 원인 (귀엽고 예쁜 동물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 동물을 맛있게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임을 모르는 걸까. 강아지도 닭도 돼지도 다 같은 생명이고 고통받아 마땅한 동물이 따로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채식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자비와 지혜의 실천행이다.

물론 나도 이전에는 육식을 했었고, 채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적어도 내 행동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해 왔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일. 바르고 옳다고 믿는 길을 혼자라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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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른 되서 만나요."

어디서?

"**동 치과 앞에서 만나요."

만나서 뭐하게?

"숨바꼭질 해요."

"나도 갈거야. 내가 차 태워줄게요."

 

어른이 되어서 만나 하자는 일이 고작 숨바꼭질이라니.

그 순수함에 마음이 즐거웠다.

그런데 나는 그때 쯤이면 여기에 없고 산에서 살것 같다고 했더니,

어디냐며 전화해서 물어보면 된단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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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적인 도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말만 있을 뿐 마음이 없기에. 마음이 없으면 행동도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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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꾸준히 공부해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_()_

 

 

 

Posted by 보리바라봄
대긍정일기2016. 5. 15. 21:14

 


 

 

몸소 자비행을 실천하고 계시는 거사님들.

2016년 5월 15일. 부처님 오신날. 지리산 홍서원에서.

 

 

 

 

 

 믿음이란 뭘까? 의심하지 않는 마음? 믿음의 대상을 온전히 수용해 버리는 것? 하지만 이 믿음은 명확한 앎 없이도 가능함과 동시에 믿고자 하는 '의지'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해지는 걸까?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 스스로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틱낫한 스님의 <귀향>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하여 믿음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책을 토대로 믿음을 일반적인 믿음(잘못된 믿음)과 참다운 믿음 으로 구분해서 보다 진실된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귀향>, 틱낫한, p. 70,71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고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 무엇에 대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또는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처음의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이 잘못 보거나 잘못 들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은 곧 잃게 되는 것으로 하나의 '관념'에 해당된다. '~은 ~이다'라는 식의 고정된 생각이 자리 잡히면 하나의 믿음으로써 기능하게 되는데, 이는 또 다른 사실이나 그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이 나타나게 되면 즉각적으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으로 참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착각', '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다운 믿음은 어떤 것일까?

 

 

<귀향>, 틱낫한, p. 70,71

 

불교에서는 믿음을 에너지의 근원이라 봅니다. 믿음과 믿음의 에너지가 있으면, 우리는 더 활기를 띠게 됩니다.

(중략…)

믿음이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만일 믿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집착하면, 나중에 자신의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이해와 지식에 관계됩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고정된 관념이 아니라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 현재의 이해가 최상의 상태이지만 더 깊은 이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앎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깊이 있게 사유하고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라나게 되며 그로인해 믿음은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믿음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는 이해 뿐 아니라 지식을 얻게 되는데, 이런 지식에 집착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에 장애가 된다. 때문에 다음 가르침을 배우기에 앞서 자기가 가진 앎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믿음은 에너지의 근원이기에 중요하다. 생명력을 잃은 삶이 아닌 생명력이 넘치는 삶. 한발 한발 나아가며 성장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지만이 비로소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한여름의 나무가 푸른 잎사귀로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것처럼. 믿음은 점점 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을 알게 되면 그 자체로 자비로운 마음이 살아 숨쉬게 된다. 쨍한 햇살 아래 시원한 그늘이 드러나 오고 가는 많은 생명들을 쉬게 하는 것처럼.

 

 이러한 참된 믿음이 자리했다면, 그 다음은 실천행이 중요하다. 지식과 사유로 끝낼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나타내어 본바탕 그대로의 자비를 증명해내야 한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느낌과 기억의 기록2016. 2. 21. 10:39

 

 

 

 

 

먹기 전부터 기대하고 맛있어하고 만족스러워 하는 요리들. 앞으로 더욱 나아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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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타인의 시선에 훼손 당하지 않으며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온전히 표현해낼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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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태어나 선하고자 마음 먹는데 있어 채식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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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드라마 ☞ <출출한 여자>가 내게 남긴 것은

저런 음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음식 속에 담긴 사랑과 신념이 몸 속으로 전달되는 즐거움이다.

(어쨌거나) 윤성호 감독과 함께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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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거운 마음으로 부터 하루 안에, 그것도 자발적인 의지가 출발점이 되어 벗어나기는 처음인 것 같다.

 

 때때로 무거운 마음이 찾아올 때면 저항을 하거나, 합리화를 시키거나, 그저 지나갈 때까지 무력하게 바라보곤 했다.

이번에 선택한 것은 처음엔 합리화였다.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 나가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감추고 숨는다. 그랬더니 4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집에서 텃밭을 일구고 도서관에 알바하러 다녔던 시절. 모든 걸 다 배척하고 '나만 옳다' 생각하며 나 잘난 맛에 살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두웠던 시간들이.

 이렇게 어두워질 때면 그 다음엔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는 마음이 찾아온다. 그런 외면이 무섭다. 

 

 그래서, 또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씀을 찾아 들었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어떤 걸까 가만히 들여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문득 나쁜 생각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하나요?> 이다.

 

 그간 내가 지어 놓은 마음 길이 너무도 많아서, 자꾸만 돌아가 이 길, 저 길에 돌아다니며 헤매게 된다는 것. 때문에 바르고 밝은 길을 새롭게 놓아야 한다는 것. 아아-

 

 이어서 <위대한 포기, 깨달음>과 <거짓말을 하면 안되는 이유> 법문도 들었다. 나를 죽이고 전체를 살리는 길과, 나의 진실성을 외면하지 않는 삶.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지면서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날 기운이 생겼다. :)

 

 이번엔 저항도, 합리화도, 무기력도 아니다. 이런 상태의 수용과 더불어 한 발짝 나아가 새로운 길의 입구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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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한 나로 머무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만남은 원치 않는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며 자기화 시키려는 사람들.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사람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온전함을 지키는 것 뿐이다. 역으로,  

나 역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어야 하며, 그들의 온전함을 지켜주어야 한다.

 

다만, 그들이 나를 향해 문을 두드려 올때 환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또한 두드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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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으면 고고하게 지켜지는 태도가 사람들과 섞이면 쉽게 흔들린다. 나는 아직 이 정도다. 

진지했던 다짐들이 너무도 쉽게 가벼워지는 걸 보면서 조심스러워졌다.

 

섣부른 조언들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삶에 상처를 입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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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이 허상인 줄로 아는 자 실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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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면서도 가장 높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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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마음은 마음에 독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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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 공간과

1과 2 사이의 무한한 공간.

 

영화 <her>와 <안녕, 헤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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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졌다"는 말이 참 듣기 좋다.

그리고 누가 해주느냐에 따라 내게 의미가 되는 말이 있는데

"예쁘다""착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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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리바라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