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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06 윤회 - 지나 서미나라 8
책 읽기2012. 7. 6. 23:09




이 책은 에드가 케이시라는 사람이 최면술을 통해 자신의 병을 고쳐내고, 후에는 다른 사람들의 병의 원인을 찾아 치유 법을 알려주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과의 법칙에 따라 전생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알려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나 사실적인 기록을 통해 증거를 제시한다. 케이시는 대상자를 만나지 않고 단지 어디에 사는 누구 라는 것만 알려주면 뭐든 정확하게 알아내곤 했다. 단, 최면 상태에서만. 그리고 그 최면은 개인적인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에는 에너지가 많이 쓰여 몸이 몹시 피곤해졌고,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 써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 깊은 감명을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생'이나 '윤회'에 대한 것이 자신의 신념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최면을 통해 진리를 밝혀내는 것을 적극 권고했던 라머스의 의견에 동의한다. 
왜 성서, 예수는 윤회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라는 물음에,
라머스 曰 : "글쎄요, 예수는 아마도 말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요."라고 답한다.

p.60-61
 성서에는 한 군데, 그가 제자에게 세레 요한이 엘리야의 재생임을 말하고 있다. (마테복음 17장 12~13절). 예수는 윤회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이가 세례 요한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예수에게 앞 못보는 장님에 대해 "주여,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은 이 사람 자신의 죄입니까, 또는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묻고 있는 대목도 주목해야 한다. 그 밖에도 분명히 윤회를 암시했거나 또는 지적한 곳이 있다. 묵시록 13장 10절에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로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했다. 이 구절에는 윤리적 응보의 법칙이 대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케이시의 리딩(투시를 통해 읽어내는 것)은 일반 대중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기록되어 남겨졌다. 그는 전생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과학과 종교의 중간 다리를 잇는다. 

p.81
 케이시 리딩의 바탕이 되는 이 생각을 이해하려면 '카르마'라는 말의 뜻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이 말이 죄와 괴로움의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유일한 말이기 때문이다.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원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철학적 개념으로서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고 있는 인과율 또는 작용·반작용을 의미한다. 인도의 브라만 철학을 따랐던 에머슨은 이 개념을 '보상의 법칙'이라고 했다. 예수가 '뿌린 대로 거두리라'라고 한 말이 단적으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뉴턴의 '운동의 제3법칙' - 모든 작용에는 그와 동등한 반작용이 따른다 - 은 물리 현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p.367
모든 행위, 즉 운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카르마의 작용 또한 에너지의 운동이다. 인간의 의식에 의하여 어떤 외계의 대상에 부딪치도록 이끌린 에너지는 고체를 관통하는 X선처럼 그 대상을 곧바로 꿰뚫는데, 그리고 나서도 그것은 여전히 원운동을 계속하여 전혀 에너지의 감소 없이 마침내 출발점으로 되돌아 온다.
(...)
 카르마의 개념은 참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서 내세우는 권선징악의 가르침에 과학적 근거를 주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와 종교간의 사이도 잇는다.

p.133
 '나는 영'이라는 의식이 자리잡으면 케이시 리딩이나 그 밖의 신비주의자들이 일컫는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할 수가 있다. 앞에서 본 실례뿐만 아니라 다른 육체적 카르마의 거의 모든 경우에도 케이시 리딩은 한결같이 그 치유를 위해서는 당사자가 적어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 의식이란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만 국한되는 특전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란 예수라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며 그 말뜻은 '기름이 부어진 자'라는 것이며, 그 신비적 내지 심리적 의미는 '해탈 의식' 또는 '영적 의식'이다. 크리슈나나 붓다도 말하자면 그리스도 의식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 스승이 누구든 또는 그 영적 자각을 무어라 부르든 다 이 그리스도 의식에 이르려고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모든 병의 원인이 전생이나 심리적 요인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p.139
 정신 지체 의학에서 인정되어 왔듯이 병의 원인이 마음에 있지 않은 경우도 흔히 있으며, 또 그 원인이 어떤 것이든 정신 요법보다는 물질적 치료로 낫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전생에 지은 인이 현생에서 과로 나타난다면,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삶을 살아갈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윤회론은 자유 의지를 확실히 인정하며 모든 일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보는 생각을 부정한다. 카르마의 숙명론적 해석을 받아들이는 힌두교도들의 무기력한 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p.368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창조자이다. 카르마는 인간의 자기 설계와 자기 창조의 한계를 나타낸다. 그런 동시에 카르마는 인간의 해방자이며 벗이다.
 이것을 알았기에 붓다는 인생의 변화 유전 속에서 고요히 말한다. "나는 법(法) 속으로 피난한다." 모든 법칙 속에 들어 있는 광대무변한 자비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설령 아무리 비인간적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주에게서 피난처를 찾는다."는 그리스도의 말처럼 감동과 위안과 격려에 넘치는 말이다. 왜냐하면 계율은 주요, 주는 계율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딩은 점성학, 정신의학, 심리학, 종교, 과학 등 다방면의 분야에 걸쳐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밝혀 지지 않은 의문들을 연구하는 이들에겐 어쩌면 이것이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모든 고통은 자신의 성장을 위한 것임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배움을 찾고, 결국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 같다. 

p.382
 어떠한 경험에 있어서든 개인의 의지보다 더 큰 충동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성은 자기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성이 외부의 거룩한 힘과 어울려 어떤 삶의 길을 선택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내 안에 있다'고 대답하는 그들의 견해를 이제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ㅎㅎ) 신성함은 나를 비롯하여 우주 만물에 비롯되어 있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사랑, 즉 진리, 법(法)을 향한 믿음에 대한 보상은, 자신을 밀고 나아갈 수 있는 자신감과 정서적 안정감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경험을 통해서 증명해 내야 한다. 뚜렷한 목표를 세워야 겠다. 그리고 나를 발전하게 하는 욕심을 내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남 탓을 하지 않는 것. 능동적으로 인내하는 것. 적극적으로 참고 견뎌내는 것. 이것은 결국엔 다 지나갈 것이고 성장의 밑거름으로 남을 것이다.   

의문 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다.  


 
Posted by 보리바라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