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6.06.12 불교의 무아론 - 한자경
  2. 2016.05.15 자라나는 믿음 2
  3. 2016.03.27 법성게 외우기 6
  4. 2016.02.21 바르고 밝은 길을 새롭게 놓아야 2
  5. 2016.01.01 귀향 - 틱낫한
책 읽기2016. 6. 12. 13:26

 

 

 

 

 

밤하늘 소녀 #19
2015_ pencil on paper & digital

아주 오랜만에 마니(☜ 링크)님 그림. 싸이월드 시절 알게 되었던 그림작가님. :)

정적이면서 식물스런 감수성이 참 좋았던 그림들 -

 

 

 

 

 

 

읽어보라고 주신 책 :)

아함경을 먼저 읽기 시작했었는데 아직도 덜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서 아함경도 읽어야지 싶다.

큰스님 말씀으론 부처님 가르침은 참 쉽다고 하셨는데, 불교 관련 서적들을 읽다보면

학창시절 이해할수 없었던 지적 정보에 대한 그 어려운 느낌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이게 싫다는 건 아니고... 공부에 대한 갈망 같은게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여서 오히려 잘됐다 싶다.

열공해야지. ㅋㅋㅋㅋ

 

 

 

 

p. 9

 왜 우리는 상대와 차이에 머무르지 못하고 절대에로 나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운명적으로 형이상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형이하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죽음을 의식하고 공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보여진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보여진 세계의 상대성을 말하지만, 그 말이 참이 될 수 있는 것은 말하는 자가 그 말 밖에 있기 때문이다.

 

 

p. 35

 관념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관념이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지 그런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과 관념이 그에 상응하는 실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통찰이다.

 

 

p. 53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p. 115

 이런 관점 하에서만 우리는 인과 과, 업과 보의 각 순간을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찰나 생멸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이 멸하고 과가 생하는 순간, 그 찰나 자체는 이전 찰나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찰나 이므로 새로운 힘의 작용, 새로운 업의 시작이 또한 가능한 것이다. 한 순간은 그 이전 순간의 업의 결과이지만, 바로 그 순간이 그 다음 순간을 결정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순간의 현재적 작용력은 단지 과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새롭게 발휘되는 힘이다. 따라서 매순간은 이전 순간에 의해 규정받는 수동성과 더불어 바로 그 순간에 새롭게 작용하는 능동성이 함께 한다. 바로 그 능동적 작용이 있기에 새로운 조업 작용이 가능하며, 그 새로운 업에 의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업의 흐름이 새로운 지향점을 향해 방향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이다.

 

 

p. 124

 이렇게 보면 불교는 선악의 근본, 업의 근본을 행위 자체에 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의도가 없어도 신업이 성립하게 되는 것은 그 행위가 주변을 돌아보는 주의나 배려의 마음 또는 상황에 대한 앎이 없는 부주의 또는 무지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p. 155

 존재하면서 업과 보의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단지 오온일 뿐이며, 그 오온에 대해서는 같다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전생의 오온과 후생의 오온은 전자가 지은 업력에 의해 후자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채, 인과 과, 업과 보로서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설한다. 자아란 오온 자체도 아니고 오온 너머에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 188-189

 즉 삼매를 수행하지 않는 일반 범부에 있어 색 등으로 나타나는 영상도 삼매에서의 영상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다르지 않은 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들에게 삼매 중에 떠오른 영상뿐 아니라 우리 일반 범부들의 일상적인 지각 의식에 떠오르는 현상 세계의 영상까지도 모두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일체가 식일 뿐이라는 '유식(唯識)'이 성립한다. 결국 범부들이 지각하는 대상 세계의 영상도 요가 수행자들이 수행을 통해 보게 된 영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p. 215

 다시 말해 현상 세계는 식에 의거하여 발생한 것이며,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상 세계는 식을 떠난 객관 실유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실유(非實有)의 가(假)이다. 유식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면서, 현상 세계를 성립시키는 연기를 의타기성으로 해석하고 의타기성을 다시 유식성으로 해명한다. 식의 삼성에서 의타기성은 바로 유식성이다. 유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아와 세계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는 것, 마음을 떠난 객관 실재가 아니라는 것, 자아와 세계는 실아와 실법이 아니고 마음이 그린 영상이며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라는 것,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대긍정일기2016. 5. 15. 21:14

 


 

 

몸소 자비행을 실천하고 계시는 거사님들.

2016년 5월 15일. 부처님 오신날. 지리산 홍서원에서.

 

 

 

 

 

 믿음이란 뭘까? 의심하지 않는 마음? 믿음의 대상을 온전히 수용해 버리는 것? 하지만 이 믿음은 명확한 앎 없이도 가능함과 동시에 믿고자 하는 '의지'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해지는 걸까?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 스스로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틱낫한 스님의 <귀향>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하여 믿음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책을 토대로 믿음을 일반적인 믿음(잘못된 믿음)과 참다운 믿음 으로 구분해서 보다 진실된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귀향>, 틱낫한, p. 70,71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고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 무엇에 대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또는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처음의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이 잘못 보거나 잘못 들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은 곧 잃게 되는 것으로 하나의 '관념'에 해당된다. '~은 ~이다'라는 식의 고정된 생각이 자리 잡히면 하나의 믿음으로써 기능하게 되는데, 이는 또 다른 사실이나 그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이 나타나게 되면 즉각적으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으로 참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착각', '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다운 믿음은 어떤 것일까?

 

 

<귀향>, 틱낫한, p. 70,71

 

불교에서는 믿음을 에너지의 근원이라 봅니다. 믿음과 믿음의 에너지가 있으면, 우리는 더 활기를 띠게 됩니다.

(중략…)

믿음이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만일 믿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집착하면, 나중에 자신의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이해와 지식에 관계됩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고정된 관념이 아니라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 현재의 이해가 최상의 상태이지만 더 깊은 이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앎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깊이 있게 사유하고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라나게 되며 그로인해 믿음은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믿음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는 이해 뿐 아니라 지식을 얻게 되는데, 이런 지식에 집착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에 장애가 된다. 때문에 다음 가르침을 배우기에 앞서 자기가 가진 앎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믿음은 에너지의 근원이기에 중요하다. 생명력을 잃은 삶이 아닌 생명력이 넘치는 삶. 한발 한발 나아가며 성장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지만이 비로소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한여름의 나무가 푸른 잎사귀로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것처럼. 믿음은 점점 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을 알게 되면 그 자체로 자비로운 마음이 살아 숨쉬게 된다. 쨍한 햇살 아래 시원한 그늘이 드러나 오고 가는 많은 생명들을 쉬게 하는 것처럼.

 

 이러한 참된 믿음이 자리했다면, 그 다음은 실천행이 중요하다. 지식과 사유로 끝낼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나타내어 본바탕 그대로의 자비를 증명해내야 한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법성게2016. 3. 27. 18:12

 

 

 

 

 

 

법성게 사경집을 두 권 쓰니 순서대로 외우진 못해도 7글자씩 기억은 났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 암기력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조금씩 외우다 보니 세 달이 넘도록 외우질 못하는 거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맘 먹고 외우니 곰방 외워지는 걸... -.-

 

 

 

1. 법성원융무이상

2. 제법부동본래적

3. 무명무상절일체

4. 증지소지비여경

5. 진성심심극미묘

6. 불수자성수연성

7. 일중일체다중일

8. 일즉일체다즉일

9. 일미진중함시방

10. 일체진중역여시

11. 무량원겁즉일념

12. 일념즉시무량겁

13. 구세십세호상즉

14. 잉불잡란격별성

15. 초발심시변정각

16. 생사열반상공화

17. 이사명연무분별

18. 시불보현대인경

19. 능인해인삼매중

20. 번출여의부사의

21. 우보익생만허공

22. 중생수기득이익

23. 시고행자환본제

24. 파식망상필부득

25. 무연선교착여의

26. 귀가수분득자량

27. 이다라니무진보

28. 장엄법계실보전

29. 궁좌실제중도상

30. 구래부동명위불

 

 

 

무연선교착여의 빼고 순서랑 틀린 글자 없이 다 맞았다. :) 캬캬.

의미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일단 외운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느낌과 기억의 기록2016. 2. 21. 10:39

 

 

 

 

 

먹기 전부터 기대하고 맛있어하고 만족스러워 하는 요리들. 앞으로 더욱 나아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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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타인의 시선에 훼손 당하지 않으며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온전히 표현해낼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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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태어나 선하고자 마음 먹는데 있어 채식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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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드라마 ☞ <출출한 여자>가 내게 남긴 것은

저런 음식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음식 속에 담긴 사랑과 신념이 몸 속으로 전달되는 즐거움이다.

(어쨌거나) 윤성호 감독과 함께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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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거운 마음으로 부터 하루 안에, 그것도 자발적인 의지가 출발점이 되어 벗어나기는 처음인 것 같다.

 

 때때로 무거운 마음이 찾아올 때면 저항을 하거나, 합리화를 시키거나, 그저 지나갈 때까지 무력하게 바라보곤 했다.

이번에 선택한 것은 처음엔 합리화였다.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 나가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감추고 숨는다. 그랬더니 4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집에서 텃밭을 일구고 도서관에 알바하러 다녔던 시절. 모든 걸 다 배척하고 '나만 옳다' 생각하며 나 잘난 맛에 살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두웠던 시간들이.

 이렇게 어두워질 때면 그 다음엔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는 마음이 찾아온다. 그런 외면이 무섭다. 

 

 그래서, 또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씀을 찾아 들었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어떤 걸까 가만히 들여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문득 나쁜 생각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하나요?> 이다.

 

 그간 내가 지어 놓은 마음 길이 너무도 많아서, 자꾸만 돌아가 이 길, 저 길에 돌아다니며 헤매게 된다는 것. 때문에 바르고 밝은 길을 새롭게 놓아야 한다는 것. 아아-

 

 이어서 <위대한 포기, 깨달음>과 <거짓말을 하면 안되는 이유> 법문도 들었다. 나를 죽이고 전체를 살리는 길과, 나의 진실성을 외면하지 않는 삶.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지면서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날 기운이 생겼다. :)

 

 이번엔 저항도, 합리화도, 무기력도 아니다. 이런 상태의 수용과 더불어 한 발짝 나아가 새로운 길의 입구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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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한 나로 머무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만남은 원치 않는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며 자기화 시키려는 사람들.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사람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온전함을 지키는 것 뿐이다. 역으로,  

나 역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어야 하며, 그들의 온전함을 지켜주어야 한다.

 

다만, 그들이 나를 향해 문을 두드려 올때 환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또한 두드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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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으면 고고하게 지켜지는 태도가 사람들과 섞이면 쉽게 흔들린다. 나는 아직 이 정도다. 

진지했던 다짐들이 너무도 쉽게 가벼워지는 걸 보면서 조심스러워졌다.

 

섣부른 조언들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삶에 상처를 입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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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이 허상인 줄로 아는 자 실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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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면서도 가장 높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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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마음은 마음에 독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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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 공간과

1과 2 사이의 무한한 공간.

 

영화 <her>와 <안녕, 헤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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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졌다"는 말이 참 듣기 좋다.

그리고 누가 해주느냐에 따라 내게 의미가 되는 말이 있는데

"예쁘다""착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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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6. 1. 1. 10:53

 

 

 

 

 

2015/12/31,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

 

 

 

 

 

p.25

 여러분이 이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과 만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을 모두 버릴 때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모든 것, 말하자면 색(色 ; 물질), 수(受 ; 감각), 상(想 ; 지각), 행(行 ; 의지), 식(識 ; 의식) 등을 거부하면서 니르바나를 구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니르바나와 접할 수 없습니다.

 

 

p.48-49

 불교에서는 이해가 사랑의 근거입니다. …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아픔을 보기 시작하면 자비가 태어나고, 그를 더 이상 원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라고 생각하는 그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상대방에게 화가 나는 것은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70-71

 불교에서는 믿음을 에너지의 근원이라 봅니다. 믿음과 믿음의 에너지가 있으면, 우리는 더 활기를 띠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고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 무엇에 대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또는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처음의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이 잘못 보거나 잘못 들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만일 믿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집착하면, 나중에 자신의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p. 76

 불교에서는 믿음이 이해를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줍니다.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면 믿음도 한층 더 자라게 됩니다.

 이해와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이해와 믿음 속에는 매 순간 죽어가는 무엇, 그리고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p.78

 의식을 집중할 때에도 먹어야 할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을 다하는 일mindfulness"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해 있는 일입니다. 먹거나 걷거나 앉거나 포옹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라도 마음을 다해서 하면 그것이 곧 의식을 집중하는 일입니다. 의식과 정신을 집중하면 이해가 생깁니다. 이해가 생기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을 하면 에너지와 부지런함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으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불, 법, 승을 믿는 것처럼 정말로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믿으면 우리에게 에너지가 넘치게 됩니다. 생기 있는 삶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활기가 없습니다. 믿음의 활기가 있으면, 발걸음이 더 힘차고 얼굴도 더 밝아집니다. 더 사랑하고 이해하고 돕고 일할 마음이 생깁니다.

 

 

p.85

 여기서 사랑이란 믿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주고 힘을 주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우리가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이것들은 한갓 관념이거나 개념이나 신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랑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수는 적어집니다. 더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줍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기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참된 영적 체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p.102

 저는 차를 마실 때 마음을 다해 차를 마십니다. 차를 마시면서 저는 차를 마신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면서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숨을 쉬면서 저는 숨을 쉰다는 사실을 의식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면서 하는 숨쉬기입니다.

 

 

p.126

 처음에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내 속에 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에서 삼귀의를 외울 때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 생에서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여기서 이 생에서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이란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나 수행을 쌓아나가면, 그분이 다른 분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불성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내 속에 있는 그 불성에 의지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믿는 대상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어떤 분에 대한 관념도, 부처됨에 관한 생각도, 불성에 대한 관념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을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재로, 현실로 접하는 것입니다. 불성이란 깨우침과 마음 다함과 집중과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입니다.

 

 

p. 172

 그러면 어떻게 니르바나에 접할 수 있을까요? 그저 이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과 접촉하면 됩니다. 한 개의 물결과 깊이 접촉하면 모든 물결들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물결의 본성은 서로 '어울려 있음 interbeing'이기 때문에 한 물결을 경험하면 모든 물결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 조각의 빵을 씹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 한 조각의 빵은 우리의 온몸, 온 우주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의 먹음, 어떤 질의 만짐, 어떤 질의 걸음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큼 집중하느냐, 우리의 수행에서 얼마큼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해 있느냐 하는 데 달렸습니다.

 

 

p. 173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현상 세계에 접할 줄 모르면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본질 세계를 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낙엽이나 그외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는 기별입니다. 낙엽이든, 하나의 물결이든, 한 명의 사람이든 그 대상과 깊이 접촉함으로써 만물의 상호 연관성 interconnectedness에 접할 수 있습니다. 늘 없음[無常] impermanence, 나 없음[無我] no-self, 어울려 있음[相卽相入] interbeing에 접하게 됩니다. 이런 어울려 있음, 나 없음에 접하게 되면, 궁극적인 차원, 하나님과 니르바나의 차원에 접하게 됩니다. 궁극적인 차원과 역사적인 차원을 구별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함께 있습니다. 없어져야 할 허상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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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함 (알아차림) - 의식 집중 - 이해 - 믿음 - 부지런함

순환의 연결고리들.

 

Posted by 보리바라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