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05.15 자라나는 믿음 (2)
  2. 2016.01.01 귀향 - 틱낫한
  3. 2015.06.27 중도란 무엇인가 - 틱낫한 (2)
  4. 2012.03.13 화 - 틱낫한 (14)
대긍정일기2016.05.15 21:14

 


 

 

몸소 자비행을 실천하고 계시는 거사님들.

2016년 5월 15일. 부처님 오신날. 지리산 홍서원에서.

 

 

 

 

 

 믿음이란 뭘까? 의심하지 않는 마음? 믿음의 대상을 온전히 수용해 버리는 것? 하지만 이 믿음은 명확한 앎 없이도 가능함과 동시에 믿고자 하는 '의지'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해지는 걸까?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 스스로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틱낫한 스님의 <귀향>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하여 믿음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책을 토대로 믿음을 일반적인 믿음(잘못된 믿음)과 참다운 믿음 으로 구분해서 보다 진실된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귀향>, 틱낫한, p. 70,71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고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 무엇에 대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또는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처음의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이 잘못 보거나 잘못 들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은 곧 잃게 되는 것으로 하나의 '관념'에 해당된다. '~은 ~이다'라는 식의 고정된 생각이 자리 잡히면 하나의 믿음으로써 기능하게 되는데, 이는 또 다른 사실이나 그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이 나타나게 되면 즉각적으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으로 참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착각', '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다운 믿음은 어떤 것일까?

 

 

<귀향>, 틱낫한, p. 70,71

 

불교에서는 믿음을 에너지의 근원이라 봅니다. 믿음과 믿음의 에너지가 있으면, 우리는 더 활기를 띠게 됩니다.

(중략…)

믿음이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만일 믿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집착하면, 나중에 자신의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이해와 지식에 관계됩니다.

 

 

 참다운 믿음이란 고정된 관념이 아니라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 현재의 이해가 최상의 상태이지만 더 깊은 이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앎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깊이 있게 사유하고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라나게 되며 그로인해 믿음은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믿음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는 이해 뿐 아니라 지식을 얻게 되는데, 이런 지식에 집착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에 장애가 된다. 때문에 다음 가르침을 배우기에 앞서 자기가 가진 앎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믿음은 에너지의 근원이기에 중요하다. 생명력을 잃은 삶이 아닌 생명력이 넘치는 삶. 한발 한발 나아가며 성장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지만이 비로소 믿음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한여름의 나무가 푸른 잎사귀로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것처럼. 믿음은 점점 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을 알게 되면 그 자체로 자비로운 마음이 살아 숨쉬게 된다. 쨍한 햇살 아래 시원한 그늘이 드러나 오고 가는 많은 생명들을 쉬게 하는 것처럼.

 

 이러한 참된 믿음이 자리했다면, 그 다음은 실천행이 중요하다. 지식과 사유로 끝낼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나타내어 본바탕 그대로의 자비를 증명해내야 한다.

 

Posted by 정아(正阿)
책 읽기2016.01.01 10:53

 

 

 

 

 

2015/12/31,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

 

 

 

 

 

p.25

 여러분이 이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과 만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을 모두 버릴 때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모든 것, 말하자면 색(色 ; 물질), 수(受 ; 감각), 상(想 ; 지각), 행(行 ; 의지), 식(識 ; 의식) 등을 거부하면서 니르바나를 구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니르바나와 접할 수 없습니다.

 

 

p.48-49

 불교에서는 이해가 사랑의 근거입니다. …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아픔을 보기 시작하면 자비가 태어나고, 그를 더 이상 원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라고 생각하는 그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상대방에게 화가 나는 것은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70-71

 불교에서는 믿음을 에너지의 근원이라 봅니다. 믿음과 믿음의 에너지가 있으면, 우리는 더 활기를 띠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고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 무엇에 대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또는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처음의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이 잘못 보거나 잘못 들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만일 믿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집착하면, 나중에 자신의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p. 76

 불교에서는 믿음이 이해를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줍니다.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면 믿음도 한층 더 자라게 됩니다.

 이해와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이해와 믿음 속에는 매 순간 죽어가는 무엇, 그리고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p.78

 의식을 집중할 때에도 먹어야 할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을 다하는 일mindfulness"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해 있는 일입니다. 먹거나 걷거나 앉거나 포옹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라도 마음을 다해서 하면 그것이 곧 의식을 집중하는 일입니다. 의식과 정신을 집중하면 이해가 생깁니다. 이해가 생기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을 하면 에너지와 부지런함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으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불, 법, 승을 믿는 것처럼 정말로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믿으면 우리에게 에너지가 넘치게 됩니다. 생기 있는 삶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활기가 없습니다. 믿음의 활기가 있으면, 발걸음이 더 힘차고 얼굴도 더 밝아집니다. 더 사랑하고 이해하고 돕고 일할 마음이 생깁니다.

 

 

p.85

 여기서 사랑이란 믿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주고 힘을 주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우리가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이것들은 한갓 관념이거나 개념이나 신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랑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수는 적어집니다. 더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줍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기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참된 영적 체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p.102

 저는 차를 마실 때 마음을 다해 차를 마십니다. 차를 마시면서 저는 차를 마신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면서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숨을 쉬면서 저는 숨을 쉰다는 사실을 의식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면서 하는 숨쉬기입니다.

 

 

p.126

 처음에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내 속에 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에서 삼귀의를 외울 때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 생에서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여기서 이 생에서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이란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나 수행을 쌓아나가면, 그분이 다른 분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불성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내 속에 있는 그 불성에 의지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믿는 대상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어떤 분에 대한 관념도, 부처됨에 관한 생각도, 불성에 대한 관념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을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재로, 현실로 접하는 것입니다. 불성이란 깨우침과 마음 다함과 집중과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입니다.

 

 

p. 172

 그러면 어떻게 니르바나에 접할 수 있을까요? 그저 이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과 접촉하면 됩니다. 한 개의 물결과 깊이 접촉하면 모든 물결들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물결의 본성은 서로 '어울려 있음 interbeing'이기 때문에 한 물결을 경험하면 모든 물결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 조각의 빵을 씹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 한 조각의 빵은 우리의 온몸, 온 우주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의 먹음, 어떤 질의 만짐, 어떤 질의 걸음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큼 집중하느냐, 우리의 수행에서 얼마큼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해 있느냐 하는 데 달렸습니다.

 

 

p. 173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현상 세계에 접할 줄 모르면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본질 세계를 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낙엽이나 그외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는 기별입니다. 낙엽이든, 하나의 물결이든, 한 명의 사람이든 그 대상과 깊이 접촉함으로써 만물의 상호 연관성 interconnectedness에 접할 수 있습니다. 늘 없음[無常] impermanence, 나 없음[無我] no-self, 어울려 있음[相卽相入] interbeing에 접하게 됩니다. 이런 어울려 있음, 나 없음에 접하게 되면, 궁극적인 차원, 하나님과 니르바나의 차원에 접하게 됩니다. 궁극적인 차원과 역사적인 차원을 구별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함께 있습니다. 없어져야 할 허상이 있을 뿐입니다.

 

 

 

 

 

 

/

마음 다함 (알아차림) - 의식 집중 - 이해 - 믿음 - 부지런함

순환의 연결고리들.

 

Posted by 정아(正阿)
책 읽기2015.06.27 18:32

 

 

"<중도란 무엇인가> 책은 다 읽었니?"

"아직이요."

"중도가 뭔지 궁금하지 않니?"

"네"

"안 궁금하다고?"

"아니요, 궁금해요."

 

^^ 힉.

 

김지연_色 밝히는 붓다_장지에 채색_2007

 

 

 

 

p. 6

 중도는 '바른 견해'이고, '바른 생각'이다. 중도는 우선 '바르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르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을 달리 보거나 해석하는 것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p. 73

 붓다는 우리에게 철학을 공부하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그리하여 보든 법(dharma :사물, 현상)의 변하지 않는 진리, 즉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고, 모든 법이 '공' 하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p. 83

 마음챙김, 집중력, 통찰은 붓다가 되는 에너지들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에너지가 습관의 힘을 변화시켜, 치유와 양분을 이끌어 낸다.

 

p. 84

 우리가 고통을 받게 되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우리는 혼자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 모두가, 행복해야만 해요.

 

 

 

Posted by 정아(正阿)
책 읽기2012.03.13 09:46


일러스트레이터 김가영 그림
(이름을 클릭하면 작가님 블로그로 갑니다:) 



p.59
 의사소통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우리는 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늘 최선을 다해서 그 문이 항상 열려 있게 해야 한다. 타인과의 평화를 원한다는 의지를 표현해야 한다.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라.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마음을 터놓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분명히 뜻을 밝히고 도움을 구하라.


p.129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감사히 여기게 되고, 마음 속 깊이 간직한다.


p.135
화는 우리의 무지, 그릇된 판단, 이해와 연민의 결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
'팃낫한? 틱낙한? 이름이 뭐 그래? 틱낫한? 틱낫한..'
중학교땐가? 한참 이 스님의 책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난 솔직히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게 생긴 책을 읽을 여력이 없었다.
대학시절 (이제 대학생이 아니고 대학시절을 회상하고 있고나...T-T)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새침한 눈으로 힐끔 바라보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화'를 낸 일이 있었다.
딱히 엄청 열받은 것은 아닌데, 화의 불씨가 당겨진 순간 부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내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이를테면 '가방이 땅에 떨어져서 흙탕물이 묻었는데 닦을 휴지가 없어서 화가 나'
'채식 뷔페에 가고 싶었는데 벌써 문 닫을 시간이 되서 화가 나'
'버스는 저쪽에서 타야하는데 니가 이쪽에서 타자고 해서 헛걸음 했잖아, 화가 나'
'또 참아야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화나!'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부글부글 하다가 노구리가 사준 붕어빵 하나를 입에 물었더니 화가 쑥 들어갔다.

화가 수그러든 후,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났다고 해서 화풀이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사람 마음까지 불편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뭔가 문제가 있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것이 이 책, 틱낫한 스님의 '화(anger)'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은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화의 불씨는 항상 마음 속에 있으며 화는 그것이 상황에 맞을 때 드러난다는 것.
즉 없던 화가 갑자기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화를 내는 사람은 화를 냄으로써 타인에게 피해를 주므로 고통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
화를 냄과 동시에 이미 고통받고 있으며 보살핌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 역시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는 이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보살피고' '끌어 안아야' 한다. 
우리가 아기를 대하듯이.

화가 날때는, 그와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우리에겐 예전과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믿고, 부정적인 것들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기쁨, 사랑, 감사, 이해 등과 같은 긍정적인 마음에 집중을 하는 것이다.


사랑을 꿀떡꿀떡 삼킬 수 있을 만큼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싶다.
모자란 마음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배울 가능성에 집중하고 점점 더 나아지고 싶다.
더 가볍게, 행복해지고 싶다.
 



 
Posted by 정아(正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