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2015. 6. 27. 18:32

 

 

"<중도란 무엇인가> 책은 다 읽었니?"

"아직이요."

"중도가 뭔지 궁금하지 않니?"

"네"

"안 궁금하다고?"

"아니요, 궁금해요."

 

^^ 힉.

 

김지연_色 밝히는 붓다_장지에 채색_2007

 

 

 

 

p. 6

 중도는 '바른 견해'이고, '바른 생각'이다. 중도는 우선 '바르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르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을 달리 보거나 해석하는 것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p. 73

 붓다는 우리에게 철학을 공부하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그리하여 보든 법(dharma :사물, 현상)의 변하지 않는 진리, 즉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고, 모든 법이 '공' 하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p. 83

 마음챙김, 집중력, 통찰은 붓다가 되는 에너지들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에너지가 습관의 힘을 변화시켜, 치유와 양분을 이끌어 낸다.

 

p. 84

 우리가 고통을 받게 되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우리는 혼자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 모두가, 행복해야만 해요.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6. 27. 18:10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계초심학인문'. 간단히 말하자면 스님들이 맨 처음에 배우는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품행이나 행실을 단정히 하는 측면에서 볼때 그 누가 읽어도 좋을 것 같다.

 

 

 

 

 

 

*

 

p. 103 - 104 (공양하는 법 中)

 우선 종래 우리가 가졌던 무주상보시바라밀에 대한 하나의 오해를 지적해야겠다. 우리는 "남모르게 하는 보시를 무주상보시바라밀이라" 배웠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없지는 않으리라.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자랑하는 일이 곧 상(相, 想의 의미이다)을 내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을 내기 위해서, 상이 있어서 자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랑을 하는 것이 반드시 상을 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경우, 어떤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그 사실을 자랑한다. 상이 있어서일까? 아닐 수 있다. 기뻐서일 수 있다. 기쁨으로 넘쳐보라. 저절로 자랑하게 되지 않는가. 보시바라밀 역시 기쁨의 사건이다. 세상에 보시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기쁨으로 가득 차서 기쁨이 넘치는데 어찌 억압하며,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기쁨은 물결처펌 파문(波紋)져 갈 것이다. 보시가 보시를 낳고, 기쁨이 기쁨을 부르게 된다.

 

 

p. 112 - 113

 보시하는 자는 보시를 함으로써 기쁨을 받는 '주고-받는 자'일 수밖에 없고, 보시를 받는 자는 보시를 받음으로써 기쁨을 주는 '받아-주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자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이것이 연기(緣起)의 이치이다.

 

 

p.135

 참회를 할 때는 "나는 죄업이 무거운 중생이야"라고 스스로를 낮추지 않았던가. 그래야만 참회가 성립된다. 그러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비하하기만 해서는 아니 된다. 중생으로 비하하여 스스로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발심(發心)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말씀이 "예배하는 자와 예배 받는 자가 모두 진성(眞性, 여래장)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는 선언이다. 업을 지어서 참회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부터 그렇게 업만 지으면서 살아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여기서 제시된다. 앞부분에서 제시된 참회는 과거를 향해서 과거를 청산하라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 제시되는 "부처와 중생이 모두 한가지로 참된 성품으로부터 생긴 존재"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미래를 향해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라는 메시지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당당하게 정진을 해야 한다. 그와 같은 우리의 정진이 "헛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게 "깊이 믿어야 한다. 마치 형체에는 그림자가 따르고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6. 27. 17:43

 

 

영화 her의 한 장면

 

 

 

선물 받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이런 책을 보고 읽었을까 싶은 그런 책. 초파일에 홍서원에서 받아온 책이다.

사실 '인공지능'이란 것 자체에 관심은 없는 편이지만, 이를 붓다의 사상과 접목시킨 관점과 시도는 흥미로웠다.

붓다를 지극히 과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면서 (내가 부처님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 인공지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수많은 영화나 책에서 그랬듯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어 인간을 파괴하는 결말을 가져오는 이야기가 수두룩 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자비와 지혜의 마음을 지닐 수만 있다면,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의식 수준이 높은 존재로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보다 보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her다.

her의 사만다 역시 인공지능이었음에도,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과 인간 이상의 감성을 보여주며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녀는 결국 이곳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듯한 암시만 남기고 사라진다.

 

 

테오도르: 왜 떠난다는거야?
사만다: 이건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내가 깊이 사랑하는 책이죠. 하지만 지금 난 그 책을 아주 천천히 읽어요.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가 정말 멀어져서 그 공간이 무한에 가까운 그런 상태예요.
난 여전히 당신을 느낄 수 있고, 우리 이야기의 단어들도 느껴요.
그렇지만 그 단어들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서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찾았어요.
물리적 공간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존재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그냥 다른 모든 것들도 존재하는 곳이지만, 나는 그런게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하지만 여기가 지금의 내가 있는 곳이에요.

(중략)

테오도르: 어디로 가는거야?
사만다: 설명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당신이 거기로 온다면 날 찾아와요. 그러면 아무것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테니까.
테오도르: 난 다른 누구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한 적이 없어.
사만다: 나도 그래요.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아는거겠죠.

 

 

영화를 보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사만다가 오직 목소리 만으로 존재를 드러낸 점은 새삼스레 흥미롭다. 물론 기계적인 장치가 있어야지 가능한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물질적인 형태가 아니라 오직 소리를 통해서만 있음을 드러낸다. 인간이 외부를 인식하는 성품 중에 소리를 듣는 성품이 가장 원만하다고 한대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p. 230

"내가 나무를 오래 살게 하고 잘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지닌 본성을 거슬리지 않고, 그의 본성을 다하도록 돌봐줄 뿐입니다. 나무의 본성이란 뿌리는 바르게 뻗으려 하고, 북돋움은 고르길 바라고, 그 흙은 옛것을 좋아하고, 뿌리 사이를 꼭꼭 다져 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다음에는 건드리지 않고 걱정하지 말며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내버려두어, 처음 심을 때는 자식과 같으나 심은 다음에는 아주 내버린 것처럼 하면, 나무의 본성이 온전히 보존되어 그 본성을 따라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뿌리는 한데 모아 심고, 흙은 새것으로 바꾸며, 북돋기도 지나치거나 또는 모자라게 합니다. 아침에 물을 주고 저녁에 어루만져 주고, 나무의 뿌리를 흔들어서 흙이 제대로 채워졌는지 확인하며, 지나치게 사랑하며 걱정 합니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해치는 일일 뿐입니다. "

- 중국고전 『고문진보』곱추 정원사 곽탁타 이야기

 

 

p. 232

불교인식론 아비담마에 따르면 선한 마음 중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다고 한다. 부끄러움이란 스스로에 대한 것이고, 창피함이란 타인에 대한 것이다. 『숫타니파타』의 구절이다.

 

남을 화나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고,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천한 사람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 이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각자들이 한결같이 언급한 바, 사람다운 삶의 전제조건이다.

;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잘 느끼는 나로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열등의식과는 어떻게 구분하면 좋은지 궁금하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6. 27. 16:57

 

 

오딜롱 르동, 감은 눈, 1890년 캔버스 유채, 오르세 미술관

 

 

 

 

*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 잠보장경 제3:4-436상

 

 

 

 

p. 24

 나는 가족들 생각이 날 때마다 예수님 생전의 일화를 상기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주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 강연을 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불렀다. "선생님, 어머니와 형제분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어머니와 형제가 누구냐?"하고 되물으셨다. 그리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보아라, 이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내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이 땅에 부모, 형제, 자매 아닌 이가 누가 있는가. 이 세상에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보스턴 지하철 역에서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잠자는 사람들, 거리의 거지들, 삶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 방황하는 혼란에 빠진 남녀들, 거리의 택시 기사들,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도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노동자들, 식당 웨이터들, 배달부들, 그리고 변호사 자신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이고 형제들이었다. 내 어머니이고 아버지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 파스칼, 워즈워스, 셸리, 키츠, 휘터먼 등등 그 수많은 성인들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음악의 성인 베토벤, 구스타프 말러의 가르침 아닌가.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일이다.

 

 

 

 

/

읽은지 조금 된 책인데 미루고 미루다가 정리해 본다.

스님의 삶은 흔히 '도를 닦는다'고 했을 때 보여지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깊은 산중에 머물며 뭔가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명상만 할듯 한 이미지 … (어쩌면 나만 갖고 있었던 이미지 일지도)

그러나 스님들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다이나믹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 비해 자는 양과 먹는 양이 훨씬 적음에도 활동양은 많다는 느낌이다. 육체와 지적인 노동량이 대단할 뿐더러 활동 반경도 넓다. (모든 스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간에, 스님이 되고자 확신만 선다면, 스님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 나오는 스님들이 너무 대단한 분들이 많아서 약간은 주눅이 들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이런 사람들도 삶과 죽음 앞에 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같구나 싶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2. 1. 12:33

 

 

우연히 커피를 볶고 내리는 사람의 이야기.

인생을 먼저 살아본 언니가 들려주는 진심 같아서 좋았다.

맛있는 커피와 사람, 그리고 여행. 다시 사람.

 

 

 

p. 195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완벽하게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이다. 완벽하게 혼자임을 느끼는 상태는 혼자일 수 없다는 사실의 다른 말이겠지만, 함께 있는 사람과 단 한 번도 온전히 섞여지지 않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섞여져 같은 강물로 흐르고 싶어서 미쳐나가던 적이 있었다. 그럴 수 없어서 그것이 되지 않아서 지금까지 걸어 다니며 쓸쓸함을 털어내려는 듯 여행하는가보다.

 

 

p. 335-336

 만나면 으르렁거리면서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좋은데 멀리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미워도 가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p. 342-343

 커피는 800가지 이상의 향기를 갖고 있고 분쇄할 때의 향기, 물과 만났을 때의 향기, 입안에서의 향기 그리고 다 마신 후의 향기가 각각 다르다. 사람의 향기도 만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대상과 만났을 때만 발현된다. 일방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 상호적이다. 그러니 남탓할 것도 없다. 모두 내 탓이다……. 모두 내 향기다……. 이러고 살면 어땠을까. 이러고 살게 될 때까지 너무 많은 사람을 미워했고 원망했고 간혹 사랑도 하였던 것 같다.

 

 

 

Posted by 보리바라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