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2016. 1. 1. 10:53

 

 

 

 

 

2015/12/31,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

 

 

 

 

 

p.25

 여러분이 이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과 만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을 모두 버릴 때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모든 것, 말하자면 색(色 ; 물질), 수(受 ; 감각), 상(想 ; 지각), 행(行 ; 의지), 식(識 ; 의식) 등을 거부하면서 니르바나를 구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니르바나와 접할 수 없습니다.

 

 

p.48-49

 불교에서는 이해가 사랑의 근거입니다. …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아픔을 보기 시작하면 자비가 태어나고, 그를 더 이상 원수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라고 생각하는 그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상대방에게 화가 나는 것은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70-71

 불교에서는 믿음을 에너지의 근원이라 봅니다. 믿음과 믿음의 에너지가 있으면, 우리는 더 활기를 띠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고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 무엇에 대해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또는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처음의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이 잘못 보거나 잘못 들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만일 믿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집착하면, 나중에 자신의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p. 76

 불교에서는 믿음이 이해를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줍니다.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면 믿음도 한층 더 자라게 됩니다.

 이해와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이해와 믿음 속에는 매 순간 죽어가는 무엇, 그리고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p.78

 의식을 집중할 때에도 먹어야 할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을 다하는 일mindfulness"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해 있는 일입니다. 먹거나 걷거나 앉거나 포옹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라도 마음을 다해서 하면 그것이 곧 의식을 집중하는 일입니다. 의식과 정신을 집중하면 이해가 생깁니다. 이해가 생기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마음을 다하는 일을 하면 에너지와 부지런함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으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불, 법, 승을 믿는 것처럼 정말로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믿으면 우리에게 에너지가 넘치게 됩니다. 생기 있는 삶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활기가 없습니다. 믿음의 활기가 있으면, 발걸음이 더 힘차고 얼굴도 더 밝아집니다. 더 사랑하고 이해하고 돕고 일할 마음이 생깁니다.

 

 

p.85

 여기서 사랑이란 믿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주고 힘을 주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우리가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이것들은 한갓 관념이거나 개념이나 신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아 있는 것이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랑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수는 적어집니다. 더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줍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기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참된 영적 체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p.102

 저는 차를 마실 때 마음을 다해 차를 마십니다. 차를 마시면서 저는 차를 마신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면서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숨을 쉬면서 저는 숨을 쉰다는 사실을 의식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면서 하는 숨쉬기입니다.

 

 

p.126

 처음에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내 속에 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에서 삼귀의를 외울 때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 생에서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에게 귀의합니다." 여기서 이 생에서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분'이란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나 수행을 쌓아나가면, 그분이 다른 분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불성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내 속에 있는 그 불성에 의지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믿는 대상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어떤 분에 대한 관념도, 부처됨에 관한 생각도, 불성에 대한 관념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을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재로, 현실로 접하는 것입니다. 불성이란 깨우침과 마음 다함과 집중과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입니다.

 

 

p. 172

 그러면 어떻게 니르바나에 접할 수 있을까요? 그저 이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과 접촉하면 됩니다. 한 개의 물결과 깊이 접촉하면 모든 물결들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물결의 본성은 서로 '어울려 있음 interbeing'이기 때문에 한 물결을 경험하면 모든 물결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 조각의 빵을 씹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 한 조각의 빵은 우리의 온몸, 온 우주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의 먹음, 어떤 질의 만짐, 어떤 질의 걸음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큼 집중하느냐, 우리의 수행에서 얼마큼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해 있느냐 하는 데 달렸습니다.

 

 

p. 173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현상 세계에 접할 줄 모르면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본질 세계를 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낙엽이나 그외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는 기별입니다. 낙엽이든, 하나의 물결이든, 한 명의 사람이든 그 대상과 깊이 접촉함으로써 만물의 상호 연관성 interconnectedness에 접할 수 있습니다. 늘 없음[無常] impermanence, 나 없음[無我] no-self, 어울려 있음[相卽相入] interbeing에 접하게 됩니다. 이런 어울려 있음, 나 없음에 접하게 되면, 궁극적인 차원, 하나님과 니르바나의 차원에 접하게 됩니다. 궁극적인 차원과 역사적인 차원을 구별하지만 사실 이 둘은 함께 있습니다. 없어져야 할 허상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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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함 (알아차림) - 의식 집중 - 이해 - 믿음 - 부지런함

순환의 연결고리들.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12. 31. 23:05

 

 

 

 

 

Ryan McGinley

 

 

 

 

 

p. 90

 몽중의식(夢中意識)은 글자 그대로 꿈 가운데의 의식이다. 우리들이 잠을 깬 상태나 잠을 자고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항상 의식을 통하여 평소 익혔던 일들이 현재의 마음과 몸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생에 익혔든 아니면 몇 년 전에 익혔든 관계없이 한 번 경험하고 체험한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의식을 통하여 다시 실현되기 때문에 꿈속에 실현된 것에 대한 의식도 몽중의식인 것이다.

-『유식학 입문』, 도서출판 대승(大乘)

 

 

p. 91

 다시 말해 이러한 모든 행동은 카르마(업)의 흔적, 즉 아뢰야식에서 연을 만나 발동한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성격이고, 운명이며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이는 반응은 모두 여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습관적인 성향이나 개인의 마음이 남아 있는 한 무의식은 존재한다. 그것은 심지어 죽어서 육체가 사라져도 카르마의 흔적이 정화될 때까지 자국이 남아 다음 생을 또 낳게 하는 윤회의 씨앗이 된다.

 

 

p.102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순환하며 진행되는 바르도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희로애락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강하고 습관적인 것에 집중하여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의 움직임을 찬찬히 지켜보고 있으면, 어떤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공백이나 간격이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보게 된다. 그 틈새는 순수한 의식으로 충만하다.

 

 

p. 218

 그 진리란, 신들조차도 우리들 자신의 영혼에서 비치는 빛이고 우리들 영혼에서 투영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영혼,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모든 것의 근원자리임을. 이는 매우 사려 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분명히 해 주지 않는 하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모든 주어진 것들의 '주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해 낸 장본인이고, 모든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p.250-251

 이와 같이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억울한 소리를 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상대의 감정에 내가 이미 흡수되어 그의 의도대로 내 마음이 이미 화가 나서 그의 노예가 되었다면, 당신은 선물을 받은 것이다. 아니면 반응을 하려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라지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때 그때 관찰하는 마음이 강해져서 오히려 상대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면 그 선물은 다시 상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잠시 그가 받을 업보를 생각하면, 한 발 더 나아가 그에게 자비의 방사를 보낸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서 어떤 상황에도 물들지 않고 초연해진다.

 

 

p. 281

 "'나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여기 있다.'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즉시 모든 성현들의 손길을 어깨와 머리에 느낄 수 있다. 그런 거대한 긍정적 에너지와 연결되면 하루 종일 힘이 생긴다. 아무리 작은 자비심을 일으키려 해도 어느 정도는 '나'가 없는 '무아'의 경지에 있어야 한다. 남의 문제를 내 문제로 느끼려면 어떻게든 자기 문제를 잊어야 한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10. 3. 21:59

 

 

 

읽고 싶었던 책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었는데 없어서 요거라도 대신 빌려 읽었다.

같이 빌려온 책들은 조금 읽다 그대로 반납하게 생겼다. 이번에 가면 진짜 재밌게 생긴 책,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빌려와야겠다.

개천절인걸 잊고 도서관에 갈 뻔 했는데 헛걸음 하지 않아서 좋다.

 

아 이제 이론으론 충분히 알 것 같다 -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말고 내 마음이 바라보는 바로 그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라는 거지 뭐. 

 

 

 

 

 

 

 

 

 

 

p. 97

 사실 여러분이 경험하는 삶도 바로 그런 식이다. 그 무엇도 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능성이며, 모든 것이 단서이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마치 여러분의 코가 여러분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그와 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놀라운 순간들을 향해 나아가는 셈이다. 가령 내가 카멜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을 뻗어 한 권의 책, 그러니까 내 인생을 뒤바꾼 책을 발견한 것처럼. 정말로 그랬다! 그때의 방랑은 주위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 기회, 또한 여기라면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대한 느낌을 얻는 기회였던 것이다.

 

 

p. 99-100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나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야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p. 282

보디 사트바는 가르침을 전할 때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지혜의 자아'에게 전해져 그 자아를 깨우고 삶으로 불러낸다.

 

 

 

 

 

(다다다다 타이핑을 치려니 손끝이 아린다.

왼쪽 검지 손가락 끝은 진즉부터 감각이 희안해졌고 살갗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우쿨렐레 재밌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9. 19. 15:53

 


 

콩꽃

 

 

 

 

 

 

 p. 32

 정리를 해서 방이 깨끗해지면 자신의 기분이나 내면과 직면하게 된다. 외면했던 문제를 깨닫게 되어 좋은 싫든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리를 시작한 순간부터 인생도 정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생이 크게 변화한다.

 

 

 

p. 41

 물건을 버리지 못하면 머지않아 반드시 물건으로 넘쳐나서 제자리에 둘 수 없게 된다.

 

 

 

p. 236

 이런 감각을 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는 비법은, 집에 돌아오면 집을 향해 "다녀왔습니다."하고 소리 내어 인사하는 것이다.

 

 

 

 

 

 

*

 이번 이사를 계기로 읽게 되었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으니 사지 않고 빌려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책을 읽으며 옷, 신발, 부엌 등을 예전보다 좀 더 깔끔하게 정리했다. 정리도 정리지만 무엇보다 큰 수확은 미적지근한 물건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안녕. 이렇게 속이 시원할수가 없다. 내친김에 곤도 마리에의 책 두 권을 더 빌려왔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책 읽기2015. 6. 27. 23:35

 

 

 

백은하. 책과 춤. 2015
A dance & A book

 

 

 

 

마지막에 조금 남겨둔 부분을 드디어 다 읽었다. 2월 중순에 이 책이 너무 좋다고 얘기해 놓고선 유월 말이 되어서야 마무리를 짓는다.

좋아하는 마음이 꾸준하지 못하고 바뀌어버리는 건 실상을 보지 못하고 상상으로 기대를 해버린 탓일까?

(하지만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면서 꾸준히 좋아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어쨌거나 이 책은 신형철이라는 사람이 타인을 쉽게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 끝없이 사고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그가 대놓고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고르거나 해석하는 관점을 보면 그가 그런 사람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게가다 그는 섬세한 사람이 아닌가.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한동안 내 블로그에 달아두었던 문장. 이 한줄의 문장이 정말이지 좋았다.

정확한 사랑이란 건 나와 타인을 구분짓는 개별적인 특성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인정되어야지 이뤄질 수 있는 것일테다.

그런 특별함 때문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 같았다. 바로 저 정확한 사랑을 통해서.

 

 

 

 

*

 

p.27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문예중앙, 2012)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p. 31, 35

 그의 이름은 '로렌스 무엇이건(Laurence Anyway)'이다. 이 이름은,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길(any way)'를 택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다.

(...)

로렌스는 '본래 여자로 태어났으므로 여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라고, 아델은 '여자를 사랑할 때만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여자'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p. 65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p.200-201

 물론 이 에피소드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같은 파이의 믿음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 물음이 그를 살게 했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논리적 역전이 발생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도출된다. 믿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면, 살기 위해 믿어야 한다는 것.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쳤을 때,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초월적인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한다. 이 판단은, 이성을 믿으라는 아버지의 말, 마음속의 일들은 이성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말 중 어느 것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맹목적인 근본주의자들을 화나게 할 만한 소리지만, 어쩌면 이것을 실용주의적 신앙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필요하니까 믿는다는 것. 여기서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유구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p. 221

 그러므로 나를 인정해줘야 할 사람은, 무엇보다도 내가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정할 만한 존재로부터 인정받아야 진정한 인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상호인정을 통해 진정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겠는데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p. 234

 이 감정에 가장 적절한 이름이 passion(열정, 수난)이 아니고 무엇일까. 수난을 부르는 열정, 즉 passion은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그것은 그토록 위험하다는 것,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고 그래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하는 그 열정이 인간의 가장 심오한 본질 중 하나라는 것 등은 이 서사의 마지막에 돌연히 제출되는, 이 시리즈 전체의 보수적인 교훈보다 더 중요한, 은밀하고 강렬한 메시지다.

 

 

 

 

음 - 정리해놓고 보니 같이 사두었던 <느낌의 공동체>도 다시 보고싶어졌다.

 

Posted by 보리바라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