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2016. 7. 30. 21:59

 

 

진성심심극미묘 (眞性甚深極微妙) - 참 진, 성품 성, 심할 심, 깊을 심, 지극할 극, 작을 미, 묘할 묘

: 참된 성품은 깊고 깊어 지극히 오묘하다.

 

 

'나'가 그려낸 에고의 상이 아닌 참된 성품의 자리, 개아가 아닌 전 우주의 하나된 자리는 드러나지 않지만 미묘하게 작용한다.

눈으로 분별하는 세계는 완전하게 비어있는 가상의 세계이나, 그 또한 불성에서 비롯한 진리의 현현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본질임과 동시에 형상이고, 진실임과 동시에 가상이기 때문에 매우 오묘하다.

개아 의식을 버리고, 에고의 집착을 버리고, 번뇌 망상과 몸을 버리고, 상을 버리라고 하지만,

참된 진리는 이미 지금 여기에 그 자체로 완벽한 현존이기에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니 고통의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안심입명처의 자리에서 정확하게 출발하여 무지무명에서 반야의 지혜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확고한 믿음으로 꾸준히 나아가다보면 서서히 본성의 지혜가 발현되어 자비희사의 무량한 마음이 보살의 길로 인도해줄 것이다.

동시에 자비의 실천을 조금씩이라도 해나가야지 만이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Posted by 보리바라봄
법성게2016. 7. 6. 20:51

증지소지비여경 (證智所知非餘境) - 증거 증, 지혜 지, 바 소, 알 지, 아닐 비, 나머지 여, 지경 경

 : 지혜로써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지 헤아림으로는 알 수 없다.

 

 

스님 법문 동영상 주소가 없는 마음 을 보았는데 그 속에서 들었던 부분과 <법성게>의 '증지소지비여경'이 같은 의미인 듯 하다.

 

<금강경>의 '무주상보시'의 의미에 대해서 알려주셨는데, 흔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없이 하는 보시를 무주상보시라 잘못 알고 있다고 하시며 식을 쓰는 우리가 상 없는 보시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대신 불생불멸하며 써도 써도 다시 차는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런게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공성의 도리를 깨우쳐야 하는데, 그러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려면 머리로 헤아리거나 분별하게 아니라, 견해를 바르게 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는 아무나 할수 없고 오직 계를 잘 지키고 선을 행하며 바르게 사는 사람 만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아 참. 감동적인 부분이다. 머리가 아니라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어야지 이해할 수 있다니... 동시에 나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하루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증지소지비여경'의 의미도 '무주상보시'가 아닐까.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 불생불멸하며 부증불감 하는 자리는 머리로 헤어리거나 분별해서는 알 수가 없고, 분명한 지혜를 가지고 오직 깨우침으로 알 수가 있다. 또한 그 깨우침은 단순히 사유를 한다고 해서 될게 아니라 자비심으로 실천행을 하는 사람이라야지 가능하다.

 

분명한 사유로 이해하며 보살들과 같은 실천행을 하는 사람,

그것이야 말로 사람답고 가치있게 살 수 유일한 길이며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이지 않을까.

 

Posted by 보리바라봄
법성게2016. 6. 11. 11:52
무명무상절일체 (無名無相絶一切) - 없을 무, 이름 명, 없을 무, 서로 상, 끊을 절, 한 일, 모두 체 

 : 이름과 모습이 없어 일체가 끊어지다.

 

 

 

: 부처의 본래 자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름도 모습도 사라지니 일체의 상이 끊어진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집착하게 되는 이름들, 형상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늘려 모든 것(전 우주)을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좋아하는 마음이 영원할 수 있을까? 싫어하는 것 또한 싫어함의 집착이다.

정겨운 이름들도, 아름다운 형상들도 모두 비어있다.

처음부터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바람에 괴로워진다.

그래서 꿈과 같이, 그림자 같이, 물거품 같이, 안개 같이 봐야 한다.

그러나 깨달음의 자리에서 벗어난 중생의 세계 또한 그 자체로 여여(如如) 하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 그러나 그걸 알기 전까지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 실천으로 완전한 앎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무명무상절일체는 공(空)을 설명하는 구절인듯 하다. 시시각각 공의 자리에서 물러남이 없기를. _()_ 옴아훔!

 

 

Posted by 보리바라봄
법성게2016. 5. 31. 20:01

 

 

제법부동본래적 (諸法不動本來寂) - 모든 제, 법 법, 아니 불, 움직일 동, 근본 본, 올 래, 고요할 적

: 모든 법은 근본 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고요하다.

 

 

 

하루를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이리저리 끄달리며 쉴새없이 변하는 것들에 집착하며 살았나 싶다. 아니 단 한순간이라도 그렇게 보내지 않은 순간이 없다는 게 맞다. 지금 여기가 늘 부동하는 본래의 자리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만큼 더 행복해질텐데. 없던 습관을 새로 만들려니 쉽진 않아도 꾸준히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난다.

 

바뀌거나, 변하거나, 움직이거나, 산만하거나, 시끄럽거나, 조잡한 것들은 그림자, 물거품, 메아리와 같다. 그렇게 보지 못할 뿐. 흔들림 없이 항상한 자리. 광대무변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그것. 동시에 자비 자체인 그것. 둘이 아닌 그것. 그 어떤 것도 바꾸거나 흔들 수 없는 본성의 자리... _()_ _()_ _()_

 

 

가까워 지거나 멀어지거나... 멀어짐에 슬픈 마음이 든다 해도 본래의 자리에선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처음부터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그래도 함께 가고 싶은 것이 사실. 

 

 

 

Posted by 보리바라봄
법성게2016. 5. 29. 22:03

 

오후 내내 드라마를 본 것을 반성하며 -.-, 자기 직전에 약간이라도 공부를 하려는 마음에

예전부터 익히고 싶었던 법성게의 첫번째 소절을 사유해 보기로 했다. 영 모른다고 하다가는 영영 모를 것 같아서

일단 시작해 보는 걸로... 반야심경도 그렇고 외우긴 했는데 한자가 어렵고 의미를 봐도 자꾸 잊어버리는 통에

하나씩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 법 법, 성품 성, 둥글 원, 화할 융, 없을 무, 두 이, 서로 상

: 법의 성품은 둥글게 화합하여 둘이 아니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저렇다. 저걸 읽는다고 크게 와닿는다거나, 알겠다거나 하는 깨우침은 없다. 그래도 이제껏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이해를 해봐야지.

 

법이란 진리를 의미한다. 진리는 어느 곳, 만물에 통하는 바로 그것. 그것의 성품이 원융하다고 하니, 사계절, 하루하루가 순환하는 원리가 떠오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는 하나 정확히 선을 그어 계절을 구분할 수 없고, 오늘/ 내일이라고는 하나 마찬가지로 뚜렷한 경계는 지을 수 없는. 진리란 나와 너의 구분이 없고, 둘이 아닌 근본 그 자리. 전체가 하나되는 항상하면서도 영원하고 걸림 없는 그것. 때문에 안과 밖이 없어 선을 긋는 이분법의 시선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자리다.

 

둘이 아닌 법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나' 라는 상이 없어져야 하고, 그래야 평등성의 지혜가, 그 중에서도 비어있음의 공성, 반야의 지혜가 싹이 튼다. 반야의 지혜를 토대로 내가 아닌 전체, 온 우주가 말하고 사유하고 행하는 자리. 그 자리는 자비, 오직 그것 뿐이다. 여기서 잠깐. 그럼 '나'라는 상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그저 무력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바로 원융한 법의 성품자리 이므로 이를 크게 믿고 행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늘 법의 자리에서 한치도 물러남이 없음을! 스스로의 마음을 항상 살피며, 에고의 마음이 곧 자비의 마음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재료임을 깨달아 꾸준히 선한 일을 지어나가며 질기고 억센 습관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나무 불법승_()_

 

 

  

Posted by 보리바라봄